양육비 주기 전에 유전자 검사부터
상담오신 분은 사건 당사자의 아버지입니다. 아들 부부가 오래전 이혼했는데 미성년 손자는 엄마가 데려 갔고 애들 엄마는 얼마 안가 재혼했는데 손자들 성과 본까지 재혼남편의 것으로 바꿔 달았다며 불만을 드러냈습니다.
사정을 들어보니 아들은 양육비를 보내지 않았고 그렇다고 저쪽에서 월급까지 차압(일본식 용어이기는 하나 내담자의 식견을 전사)해서 가져갔다며 독한 사람들이라며 비난 일색이었습니다.
그래도 양육비는 보내 주어야 한다는 본직의 타이름에 대해, 줄 때 주더라도 친자확인부터 해 보고 맞다고 나와야 주겠다며 유전자 검사를 할 수 있는 소송이 무엇이냐고 물어왔습니다. 손자나 애들 엄마가 임의로 검사에 응할 리는 없기 때문에 소송을 통해 수검절차를 밟을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아들이 원하는 바이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하니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지만 불신이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떨쳐 내지 못한 것이 혼인생활 내내 발목을 잡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상담을 이어가기로 했습니다. 불편하게도 이 같은 친자관계 불신의 상담은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가정법원은 유전자 검사 결과를 그대로 공표하는 대의기관이 아니고 과학적 검증은 실체적 판단을 위한 요증사실에 관한 하나의 증거에 불과한 것이어서, 출생신고에 의한 인지(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 제57조 제1항) 또는 무효행위의 전환(민법 제138조)으로서의 출생신고 입양(대법원 2000. 6. 9. 선고 99므1633, 1640 판결)을 통한 법정혈족관계도 성립하는 만큼 친자확인이 그 자체로 일도양단의 결단이 될 수는 없습니다.
유전자 혼탁의 의심을 받는 내담자의 손자는 「민법」 제844조에 따른 혼인 중 출생자로서 친생추정을 받는 자입니다. 친생추정을 받는 자에 대해서는 「민법」 제846조 친생부인의 소에 의해서만 다툴 수 있고 그 사유가 있음을 안 날로부터 2년 내에 제기해야 합니다. 친생추정을 받는 자에 대한 친생자관계 부존재 확인의 소는 부적법한 것이므로(대법원 1992. 7. 24. 선고 91므566 판결, 대법원 2000. 8. 22. 선고 2000므292 판결) 제척기간 도과가 우선 문제됩니다.
다만 ‘동서(同棲)의 결여’의 한도에서 예외적으로 친생부인을 제소기간의 제한이 없는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의 소로 다툴 길은 있습니다(대법원 1983. 7. 12. 선고 82므59 전원합의체 판결). 그러나 이와 같은 예외적 사안은 보다 엄격히 판단합니다.
판례는 위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 친생부인의 소를 우회할 수 있는 ‘동서의 결여’는 ‘부부 중 한쪽이 장기간 외국에 거주하고 있었다든가, 사실상 이혼하여 남남처럼 살고 있다는 등 동서의 결여로 인하여 처가 부의 자식을 포태할 수 없음이 외관적으로 명백한 경우(대법원 1990. 12. 11. 선고 90므637 판결)’로 엄격하게 한정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평화와 자의 법적 지위를 보호하는 사회적 기능을 담당하는 「민법」 제844조의 추정규정을 판례로 반감하여 부모의 동서 결여에 아무런 잘못이 없는 자로 하여금 그 판결의 효력을 받게 하는 것은 다소 가혹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부가 추정을 다투는 순간 가정의 평화는 파괴되고 모와 자의 인격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게 됨은 자명한 일입니다.
동서의 결여에 관한 증명책임도 원고인 부에게 있음은 물론입니다.
모자관계는 포태와 분만이라는 자연적 사실로 확정되지만(인공수정은 논외) 부자관계는 추정에 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이 남자에게 자유를 준만큼 믿음이라는 고뇌도 함께 준 탓입니다.
그로인해 「민법」 제844조에서는 남편의 자녀로 추정하는 규정을 두었고, 이 추정은 아내가 출산한 자는 통상 남편의 자라는 경험칙에 기한 법률상 추정으로써 반증은 물론 반대사실의 증명(본증)에 의한 복멸도 허용하지 않는 강력한 효력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입법자의 의사는 가정의 평화를 우선으로 고려한 듯합니다.
친생추정 제도는 법률적인 친자관계를 진실에 부합시키고자 하는 부의 이익과 친자관계의 신속한 확정을 통하여 법적 안정을 찾고자 하는 자의 이익을 어떻게 그 사회의 실정과 전통적 관념에 맞게 조화시킬 것인가에 관한 문제로서(헌재 95헌가14, 96헌가7 결정) 입법자는 가정의 평화와 자의 법적 지위를 보호하기 위해 위험을 감수한 부에게 위험을 알지 못했던 자 보다 큰 부담을 지운 것으로 보입니다.
민법 제844조 제1항의 친생추정은 반증을 허용하지 않는 강한 추정이므로, 처가 혼인 중에 포태한 이상 그 부부의 한쪽이 장기간에 걸쳐 해외에 나가 있거나, 사실상의 이혼으로 부부가 별거하고 있는 경우 등 동거의 결여로 처가 부(부)의 자를 포태할 수 없는 것이 외관상 명백한 사정이 있는 경우에만 그 추정이 미치지 않을 뿐이고, 이러한 예외적인 사유가 없는 한 누구라도 그 자가 부의 친생자가 아님을 주장할 수 없는 것이어서, 이와 같은 추정을 번복하기 위하여는 부가 민법 제846조, 제847조에서 규정하는 친생부인의 소를 제기하여 그 확정판결을 받아야 하고, 이러한 친생부인의 소가 아닌 민법 제865조 소정의 친생자관계부존재확인의 소에 의하여 그 친생자관계의 부존재확인을 구하는 것은 부적법하다(대법원 2000. 8. 22. 선고 2000므292 판결; 대법원 1992. 7. 24. 선고 91므566 판결).
위와 같은 내용의 상담은 당사자 본인이 직접 신청하는 경우 본직이 역정을 내기 마련이므로 고령의 아버지가 대신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여성의 약점과 남성의 무책임을 동시에 보여주는 저열한 의혹입니다. 누구보다 손자가 받을 존재의 충격은 그 자체로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되고, 친자로 확인될 경우 남보다 못한 배신의 굴곡은 돌이킬 수 없는 원한으로 남게 될 것이 우려됩니다.
위 판례의 제한된 추정과 같은 법의 불가피한 골목을 이용해 다른 목적으로 소를 우회하고자 고안한 자체도 법원을 경시하는 태도로 보이기도 합니다.
내담자가 남이 된 며느리와 사돈댁에 대한 불만과 원한이 아무리 깊다 한들,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가축과도 같이 검사를 해봐야 친자를 알 수 있는 그런 미물취급을 자초해선 안 됩니다. 문명인으로서 이성과 합리적 사고를 통해 가족과 인륜의 가치를 지켜줄 것을 정중히 권고 드립니다.
울산지방법원 사법접근센터 민원상담관 이성진법무사